2022년 서울대학교 제76회 후기 학위수여식 축사 연단에 선 허준이 교수. 그는 필즈상 수상자의 권위보다 “07년도 여름에 졸업한 수학자”라는 자기소개로 말을 시작한다.

허준이 교수의 서울대 졸업식 축사는, 이상하게도 성공한 사람의 말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필즈상 수상자가 졸업생 앞에 섰다. 형식만 놓고 보면 거의 정해진 길이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크게 꿈꾸라.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라. 언젠가 오늘의 불안도 의미 있는 과정이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허준이 교수는 그 길로 오래 걷지 않는다. 오히려 그 길의 위험을 먼저 보여 준다. 성공한 사람이 자기 과거를 설명하기 시작할 때, 우연은 의지로 바뀌고, 운은 기질로 바뀌고, 방황은 필연적인 준비 과정처럼 보이기 쉽다.

이 축사가 오래 남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성공담을 기대한 자리에서, 그는 성공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이 하루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길을 잃은 시간은 어떤 표정으로 남는지, 그리고 왜 친절이 삶의 마지막 문장 가까이에 놓여야 하는지를 말한다.

오래 기억되는 하루는 많지 않습니다

허준이 교수는 축사를 숫자로 연다. 사람이 80년을 건강하게 산다면 약 3만 일을 산다. 숫자로 쓰면 제법 많아 보인다. 하지만 정말로 오래 기억하며 살아가는 날은 그중 얼마 되지 않는다.

“먼 옛날의 나와, 지금 여기의 나와, 먼 훗날의 나라는 세 명의 완벽히 낯선 사람들을 이런 날들이 엉성하게 이어 주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졸업식을 조금 다르게 보게 만든다.

졸업식은 보통 끝과 시작의 행사다. 학위를 받고, 사진을 찍고, 다음 자리로 이동한다. 그런데 허준이 교수의 말 안에서 졸업식은 이력서의 한 줄이 아니라, 서로 낯선 세 명의 나를 이어 주는 드문 매듭이 된다. 과거의 나, 지금의 나, 미래의 나. 우리는 그 셋을 같은 사람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서로를 잘 모른다.

어떤 하루는 그 낯선 셋 사이에 희미한 다리를 놓는다. 졸업식은 그런 하루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축사는 거창한 미래보다 먼저, 오늘 하루의 무게를 세운다.

객석의 졸업생들이 무대를 바라보는 장면. 졸업식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절차가 아니라, 훗날의 자신이 다시 붙잡을 수 있는 드문 하루로 놓인다.

성공담은 늘 조금 위험합니다

졸업식 축사는 위험한 장르다. 말하는 사람은 이미 어떤 성취의 자리에 서 있고, 듣는 사람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시간 앞에 있다. 이 비대칭 때문에 조언은 쉽게 자기 자랑이 된다.

허준이 교수는 그 위험을 숨기지 않는다.

“우연과 의지와 기질이 기막히게 정렬돼서 크게 성공한 사람의 교묘하거나 진부한 자기 자랑을 듣고 말 확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을 먼저 꺼낸다는 것은, 자기가 선 자리를 의심한다는 뜻이다.

성공한 사람의 과거는 대체로 사후 편집된다. 실패는 복선이 되고, 결핍은 원동력이 되고, 방황은 남다른 선택이 된다. 듣는 사람은 그 이야기를 보며 자기 삶도 그런 서사로 정리되어야 한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길을 잃고 있는 시간은 그렇게 단정하지 않다. 그 시간은 대개 초라하고, 지루하고, 설명하기 어렵다. 나중에 의미가 생길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 의미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허준이 교수는 그래서 자신의 대학 시절을 성공담의 첫 장면으로 바꾸지 않는다. 15년 전 자신의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겁이 나서였을 수도 있고, 충실하지 못한 대학생활이 부끄러워서였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서울대학교 제76회 후기 학위수여식 무대 전체. 이 축사는 무대의 권위를 빌려 말하기보다, 졸업 축사라는 형식 자체를 먼저 의심하며 시작한다.

무대 위에 있는 사람은 필즈상 수상자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먼저 등장하는 사람은 졸업식에 오지 못했던 졸업생이다. 이 순서가 이 축사의 태도를 만든다.

길 잃음은 나중에야 이름이 붙습니다

축사의 중심에는 대학생활의 기억이 있다.

“제 대학 생활은 잘 포장해서 이야기해도 길 잃음의 연속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잘 포장해서 이야기해도”다. 포장을 해도 길 잃음이었다는 말이다. 성공한 뒤에도 그 시절을 다른 이름으로 바꾸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는 똑똑하고 건강하고 성실하기까지 한 친구들을 보며, 자신 같은 사람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고 말한다. 은사님이 “잘 쉬고 돌아오라”고 해 준 말은 듬성듬성한 성적표 위에서 아직도 자신을 쳐다보는 듯했다고 한다.

이런 장면은 조언보다 오래 간다. 왜냐하면 조언은 대개 정답의 형태로 오지만, 장면은 사람이 실제로 견딘 시간의 모양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길을 잃은 사람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말은 “언젠가 다 의미가 있을 것”일 때가 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의미가 되지 않은 시간에 너무 빨리 이름을 붙이면, 사람은 자기 불안을 설명하지 못하는 자신을 다시 탓하게 된다.

허준이 교수의 말은 조금 다르다. 길 잃음은 길 잃음이었다. 불안은 불안이었다.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이었다. 다만 그 시간을 지나온 사람이 지금 여기 서 있다는 사실이, 조용히 다른 가능성을 열어 둔다.

도전하라는 말에도 비용이 있습니다

졸업 이후의 시간에 대해 그는 낙관적인 약속을 주지 않는다.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끝은 있지만 잘 보이지 않는 매일의 반복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 생각보다 힘들 수도 있고, 생각만큼 힘들 수도 있다.

그리고 짧게 말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어른입니다.”

보통 이 문장 뒤에는 익숙한 조언이 붙는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안전한 길에 만족하지 말라.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라. 크게 도전하라.

허준이 교수도 그 말들을 꺼낸다. 하지만 곧바로 멈춘다.

“이제 본격적으로 어른입니다”라는 대목. 그는 흔한 도전 서사를 꺼내지만, 그 말이 개인에게 떠넘길 수 있는 비용을 곧바로 짚는다.

“모두 좋은 조언이고 사회의 입장에서는 특히나 유용한 말입니다만, 개인의 입장은 다를 수 있음을 여러분은 이미 고민해 봤습니다.”

이 대목은 작지만 날카롭다.

사회는 도전을 좋아한다. 많은 사람이 위험을 감수하고, 그중 일부가 새로운 성취를 만들면 사회 전체는 앞으로 간다. 그러나 개인에게 실패는 통계가 아니다. 개인에게 실패는 시간이고, 돈이고, 관계이고, 회복해야 할 몸과 마음이다.

그래서 “도전하라”는 말은 언제나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용기가 되지만, 누군가에게는 자기 자신을 더 세게 몰아붙이라는 명령처럼 들릴 수 있다.

허준이 교수는 도전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도전이라는 말이 개인의 고통을 너무 쉽게 사회의 이익으로 환산하는 순간을 경계한다. 졸업생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구호가 아니라, 자기 삶의 비용을 스스로 헤아릴 수 있는 권리일지도 모른다.

준비만 하다가 하루를 잃지 않기

축사에서 가장 서늘한 문장은 이쪽에 가깝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 줍니다.”

삶은 선언보다 반복으로 대답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큰 결심보다 매일의 선택, 매일의 표정, 매일의 관계 안에서 조금씩 드러난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 자주 준비에 붙잡힌다는 것이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준비, 승진 준비, 노후 준비.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일은 필요하지만, 어느 순간 하루 전체가 준비의 재료가 된다. 오늘은 오늘로 경험되지 못하고, 다음을 위한 통과 절차가 된다.

허준이 교수는 이 흐름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어느 병원의 그럴듯한 1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차갑게 들리지만, 그래서 정확하다. 삶 전체가 준비가 되어 버리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는 좋은 끝을 준비하느라 살아 있는 하루를 놓칠 수 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다른 쪽이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여기서 이상한 짝이 나온다. 의미와 무의미.

무의미만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다. 의미도 폭력이 될 수 있다. 모든 경험이 성장이어야 한다는 압박, 모든 선택이 커리어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 모든 하루가 설명 가능한 진보여야 한다는 압박. 그런 의미는 삶을 살게 하기보다 삶을 평가하게 만든다.

그러니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라는 말은 느슨한 위로가 아니다. 의미의 압박과 무의미의 허무 사이에서, 하루를 하루로 잃지 않으려는 태도다.

친절은 약한 말이 아닙니다

마지막에 수학 이야기가 나온다. 이 대목에서 축사는 다시 허준이 교수다운 자리로 돌아온다.

“수학은 무모순이 용납하는 어떤 정의도 허락합니다. 수학자들 주요 업무가 그중 무엇을 쓸지 선택하는 것인데,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가능한 여러 가지 약속 중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구조를 끌어내는지가 그 가치의 잣대가 됩니다.”

수학에서는 모순이 없다고 해서 모든 정의가 같은 무게를 갖지는 않는다. 어떤 정의는 더 아름다운 구조를 열고, 어떤 정의는 덜 fruitful하다. 결국 수학자의 일은 가능한 약속들 사이에서, 어떤 약속이 더 좋은 세계를 만들 수 있는지 고르는 일이기도 하다.

수학과 언어를 말하는 대목. 허준이 교수는 수학자의 일을 “가능한 약속 중 무엇이 아름다운 구조를 끌어내는지 선택하는 것”으로 설명한 뒤, 그 시선을 사람 사이의 언어로 옮긴다.

그 생각은 사람 사이의 언어로 옮겨간다. 우리는 서로를 어떤 약속 아래에서 부를 것인가. 타인을 경쟁자, 평가자, 배경, 방해물로 부를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성과를 내야 하는 도구로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약속도 가능하다.

“타인을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잠시지만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함께하고 있는 타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이 문장에서 친절은 도덕 교과서의 단어가 아니게 된다. 친절은 시간에 대한 상상력이다.

타인을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미래의 나처럼 대하는 것. 자기 자신을 함부로 써도 되는 물건이 아니라, 잠시 함께 있는 타인처럼 대하는 것. 그렇게 보면 친절은 부드러운 성격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 선택이다. 사람을 오래 살게 하는 언어의 약속이다.

그래서 마지막 당부는 단순하지만 가볍지 않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길 바랍니다.”

길을 잃은 채로도 건넬 수 있는 말

허준이 교수의 축사는 길지 않다. 그런데 짧은 말 안에 이상한 균형이 있다. 그는 길 잃음을 미화하지 않고, 도전을 폐기하지 않고, 성공을 자랑하지 않고, 친절을 약하게 만들지 않는다.

졸업식 축사는 보통 미래를 향해 등을 떠민다. 앞으로 가라고 말한다. 더 멀리 가라고 말한다. 더 크게 살라고 말한다.

이 축사는 조금 다르게 들린다. 앞으로 가되, 너 자신을 너무 쉽게 소모하지 말라는 말. 준비하되, 준비 때문에 하루를 잃지 말라는 말. 길을 잃었더라도 그 시간을 너무 빨리 실패나 성장으로 판정하지 말라는 말. 그리고 가능하면 서로에게, 자신에게, 먼 미래의 우리에게 조금 더 친절한 언어를 남겨 달라는 말.

그 정도면 졸업식에서 건넬 수 있는 꽤 좋은 축복입니다.

아직 무엇이 될지 모르는 사람에게, 이미 무엇이 된 사람이 줄 수 있는 가장 조심스러운 말. “나처럼 되라”가 아니라, “너를 너무 거칠게 다루지 말라”는 말.

그래서 이 축사는 성공담보다 오래 남는다.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길을 잃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문장들이기 때문이다.


출처: 서울대학교 YouTube, “제 대학생활은 길 잃음의 연속..” 졸업생 감동시킨 필즈상 허준이 졸업식 축사. 축사 전문 대조: 중앙일보, “서로에게, 자신에게 친절하라” 서울대 졸업생 앞에 선 허준이 조언.